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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5 08:11:22

니콜라 부르바키

1. 소개2. 진실3. '원론' 시리즈

1. 소개

Nicolas Bourbaki

20세기 최고의 먼치킨 수학자. 현대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한 사람이 써냈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저작물,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인용하지 않는 독특한 글쓰기, 오해의 여지가 있다며 그림과 예제를 넣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수학계의 노벨상인 필즈상을 복수 수상, 게다가 2번이나 3번도 아닌 5번이나[1] 수상했다는 것만 보아도 그의 위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진실

파일:부르바키.jpg

니콜라 부르바키(Nicolas Bourbaki)는 20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수학자들의 단체가 사용한 필명이다. 즉, 앨런 스미시, 야타테 하지메, 토도 이즈미, 혼고 아키요시, 야츠데 사부로와 비슷한 성격의 가상의 인물이다. 원래는 19세기 프랑스군 장군[2]의 이름에서 따온거라고 하는데,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하던 라울 위송이라는 역덕이 갓 입학한 신입생들의 첫 수업 때 제복을 입고 수염까지 붙인채 뉴비들이 알아들을 턱이 없는 어려운 정리를 칠판에 적어두던 장난을 앙드레 베유가 보고 감탄(...)한 데서 유래했다.

한편,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독일은 과학자들이 연구를 계속하도록 배려하였고, 프랑스는 젊은 과학자들이 직접 나가 싸우게 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수학계는 1차 대전 직후 전전세대 교수와 공부를 막 시작하는 학생들로만 구성되었으며, 실질적으로 수학을 이끌어 나갈 중간 허리가 없는 공백을 갖게 되었다. 교과서와 분야별 용어도 매우 제각각이라 깊이 공부할수록 혼란이 심해지는데 누구도 이를 교통정리하려 하지 않는 현실에 탄식하던 앙드레 베유 등의 수학자들은, 당시 50세 이상의 대가들에겐 자신들에게 새로운 학문의 조류인 폴란드의 수학을 소화해 전달해 줄 능력이 없다 판단하였다. 이에 수학자들이 현대 수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인맥, 학맥을 동원하여 프랑스의 수학자들을 불러모아 팀을 짜기 시작했다. 이 팀원들은 1935년부터 현대 수학을 집합론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목적으로 저술 활동을 시작, "니콜라 부르바키"라는 이름으로 책을 발표했다.[3] 그들의 저술은 최대한의 엄밀성과 일반성을 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부르바키는 철저하게 다비트 힐베르트의 공리주의와 20세기 전반 프랑스 철학계를 주도하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스타일의 구조주의에 입각하여 현대수학을 통일성있게 체계화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수학이 수학자들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화되고, 또 그 목적이나 방법에 있어서도 수학자들이 서로 완전 고립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체계적인 저술을 통해 현대수학을 자기완비적으로 총정리하기로 하였다.

1939년 이후 부르바키라는 이름으로 40여권의 책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프랑스의 한 전직교수로 알려져 있었으나[4] 후대에야 여러 명의 수학자 모임의 가명임이 알려졌고[5], 앙드레 베유를 필두로 앙리 카르탕[6], 클로드 슈발레, 장 쿨롱, 장 델사르트, 장 디외도네[7], 샤를 에레스만, 르네 드 포셀[8], 숄렘 만델브로이트 등의 창립멤버가 알려졌으며, 50세 이상 나이를 먹으면 물갈이를 결의하는 암묵의 룰[9]에 따라 합류한 2세대 이후 로랑 슈바르츠, 르네 톰, 장피에르 세르,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사무엘 에일렌베르크, 서지 랭, 존 테이트, 피에르 카르티에, 로제 고드망 등의 다른 참가자들도 알려졌으나, 초창기의 멤버들 중엔 아직 신원이나 참가 여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들이 남아있다.

파일:Bourbaki_congress1938.png
1938년 멤버들의 단체사진. 사진에 있는 홍일점 여성은 앙드레 베유의 동생인 행동주의 철학자 시몬 베유로, 오빠를 도우려고 초창기 모임에 몇 번 동석하여 수학을 배우기도 했다.

전간기에 발족하여 늦게는 1980년대까지 저술을 이어간 니콜라 부르바키의 영향으로 현대수학에서는 학술언어로 영어 못지 않게 프랑스어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10] 다만 오늘날의 부르바키 수학자들은 그냥 정기 세미나에서 최신 연구 동향을 공유하고 토론하는데에 치중할 뿐 옛날처럼 부르바키 명의로 교과서나 논문을 내는데엔 관심이 덜한 듯 보인다.[11] 현대수학의 최전선까지 진군하기 위해 부르바키의 저술을 읽어보면 좋지만 부르바키라는 학자가 아직 현역이라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이러한 부르바키의 쇠락에 대해서는 여러 요인이 지목되는데, 부르바키의 책을 보고 자라난 후세대를 중심으로 역량을 상당히 키워서 더 이상 부르바키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프랑스 및 유럽 수학회의 수준이 높아졌지만 그동안 부르바키는 반대로 멤버들이 여러 영미권 명문대로 스카우트되어 떠나는등 각자도생 현상이 심화하며 부르바키의 학술적 역량이 상대적으로 정체 내지는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우선 꼽힌다. 당장 부르바키의 창립멤버인 앙드레 베유조차도 전쟁통에 대서양을 건너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자리를 잡았으니... 또 한가지로는 범주론 논쟁이 꼽힌다. 1950~60년대에는 카르티에나 그로텐디크, 에일렌베르크를 비롯해 범주론이 대두되던 시절부터 부르바키의 저술에 있어 범주론의 언어를 써먹는 것에 소극적인 부르바키 멤버들의 완고한 태도에 질려서 탈퇴하는 회원이나 가입을 포기하는 외부 수학자들이 좀 있었다. 범주론의 본좌 손더스 맥레인도 이 격동(?)의 시절에 부르바키의 정모에 초청되었으나 프랑스어가 서툴러서 제대로 된 논쟁을 벌여보질 못했다는 사연이 전해진다.[12] 현대 수학에서 범주론이 대수학 및 수학 전반에 걸쳐 중요한 툴로 꼽히는 것을 생각하면 범주론을 거부한 것이 부르바키의 최대의 실수라 할 수도 있을 정도. 사실 마냥 거부했다기보다는 수십년간 수십권의 거대한 저술 프로젝트를 집합론에 기반하여 진행하며 엄청난 고생을 했는데 범주론으로 그 짓을 또 해야겠냐는 부담감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런 범주론 논쟁에서 범주론을 중심으로 그간의 저술을 다시 쓸 것을 주장하다 반대하는 다수파에 밀려난알렉산더 그로텐디크나 피에르 카르티에를 비롯한 탈퇴자에다 소련 수학자 블라디미르 아놀드(Vladimir Arnold; Влади́мир Арно́льд) 등을 막라한 많은 외국 수학자들이 부르바키의 엘리트주의적인 연구 및 저술 방식에 불만을 품거나 당최 알아먹을 수는 있게 써야지 철저히 공리주의적이고 추상적으로 일관한 본질주의적 교육을 추구한 결과 수포자 양산 교육으로 이어진 새수학운동(New Mathematics Movement)의 사상적 교주라 할 수 있는 부르바키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것도 부르바키의 쇠락을 이끈 원인이 되었다.[13] 이들의 주장은 조금 과장하면 거의 소칼 사건과도 유사한 시선이지만, 어쨌든 이들의 업적은 부르바키의 까들도 인정하는 편으로, 대체로는 현대수학을 집대성하자는 시대적 사명을 다했으면 적당히 사라지거나 새 시대에 맞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져가야 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외길을 고집하다 뇌절에 이르렀다는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비판이다. 실제로 부르바키를 때려치고 열심히 깠던 수학자들도 정작 자기들에게 지도받은 제자들은 부르바키에 가입하는 경우도 여럿 있었다.

위의 필즈상 수상 기록은 실제로 맴버들이 받은 것들. 50년도 로랑 슈바르츠, 54년 장-피에르 세르, 66년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82년 알랭 콘, 94년 장-크리스토퍼 요코즈. 눈썰미가 좋다면 필즈상의 나이 제한이 40세 이하인데 첫 번째와 마지막이 40년을 넘는다는 것부터 알아챘을 것이다.

어쨌든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 끊임없는 토론과 연구를 거듭하며 정체를 숨긴 집단지성으로서 성공적인 업적을 이룩해냈다는 역사상 보기드문 사례를 남긴 부르바키의 영향으로 수학 외의 분야에서도 이 이름을 따서 각종 모임의 이름을 짓는 예도 있다. (의료법 스터디 모임 니콜라 부르바키에 관한 기사) 부르바키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여기보다 훨씬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니 영문 위키백과를 참고하기 바란다. 또 국내에 수학 저술가 아미르 악젤이 지은 "수학 미스터리, 니콜라 부르바키(알마 출판사)"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현재는 절판.

3. '원론' 시리즈

  1. Set theory( 집합론)
  2. Algebra( 대수학)
  3. Topology( 위상수학)
  4. Functions of one real variable( 실해석학)
  5. Topological vector spaces(위상 벡터 공간)
  6. Integration(적분)
  7. Commutative algebra(가환 대수학)
  8. Lie groups and algebras( 리 군과 리 대수)[14]
  9. Spectral theory(스펙트럼론)
  10. Algebraic topology( 대수적 위상수학)

[1] 1950년, 1954년, 1966년, 1982년, 1992년 [2] 샤를드니 부르바키(Charles-Denis Bourbaki)라는 장군으로, 크림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등에 참전했다. [3] 초창기엔 소련 혁명에서 희생된 러시아 수학자의 유고라는 기믹을 내세웠으나, 폴란드인 회원들이 기분나빠해서인지 그냥 프랑스의 노교수 기믹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멤버들은 가짜로 러시아 학회원 명함 등을 논문과 함께 갖고 다녔는데, 하필 2차대전(...)기에 눈치없이 신원불명의 러시아인 명의 논문과 명함을 갖고 다닌 앙드레 베유는 핀란드를 방문했다가 핀란드 정보부에게 소련 간첩으로 몰려 코렁탕을 들이킬 뻔 했다. 베유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도 아니고 그냥 자기는 군대 체질이 아니라고 군복무를 하기 싫어하던 부잣집 날라리(...)였는데, 이 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원래 프랑스군 군적에 등록되어 있던 장교 신분을 말소당하고 이등병 소총수로 구르게 된다. 다행히 프랑스군이 영국으로 철수하면서 꾀병을 부려 최전선 총알받이 신세가 되는 일은 면했고, 용케도 운이 연달아 따라주면서 전쟁통에 목숨을 건져 부르바키 모임으로 돌아오는데 성공했지만, 그렇게 목숨을 건졌다는 방법이 하필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취직이었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베유의 존재감이 옅어지고 결속력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4] 2차대전기에 유럽 전선에 참전한 수학자 출신 미군 장교들이 부르바키라는 노교수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당연히 행방을 알 수가 없어서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거나 멀리 피난간 줄로만 알고 부르바키 저술 서적만 챙겨서 귀국했다는 일화도 있다. [5] 1950년 전후로 Mathematical Reviews 에디터였던 Ralph Boas가 이를 공개 저널에 폭로했는데, 부르바키는 이에 "ㅋㅋㅋㅋ사돈 남말하고 있네여 Boas야말로 여러 이름 갖고 조합한 역 두문자어잖아!!!"라는 가짜 뉴스로 보복했다.(...) 참고로 이 보아스는 수리물리학 교재 저자로 유명한 Mary Boas의 남편 되시는 분. [6] 이 사람은 대를 이어 수학자로 활동했는데, 아버지 엘리 카르탕조차도 니콜라 부르바키가 여는 세미나 초청장이나 부르바키를 소개하는 앙드레 베유의 추천서(...) 같은 편지를 받았다. 그래도 아들한테 진상을 듣고는 부르바키의 작업에 여러모로 도움을 주며 다른 주요 멤버들에게도 존중받았다. [7] 리더인 베유와 ENS 시절부터 함께 공부했으며 늘 난장판으로 정신없이 이어지던 부르바키식 끝장토론의 원고를 정리하고 최종본을 작성하는 문서 작업을 담당하여 부르바키만의 독특한 저술 스타일을 완성한 장본인. 비슷한 분야에서 활동한 후배 그로텐디크가 IHÉS에서 저술하는 대수기하학 저술에 있어서도 도움을 줬다. [8] 설정상 니콜라 부르바키의 대모였던 에블린 드 포셀의 남편이었으나, 아내가 앙드레 베유랑 바람이 나버려서(...) 일찍 탈퇴했다. [9] 수학계에는 예로부터 지금까지도 나이가 들면 창의적인 연구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부르바키 원년멤버들 역시 고인물을 대신하여 현대수학을 일신하자는 의도로 시작한 것이기에 자신들도 나이가 들면 적폐청산 스스로 물러나기로 결의했다. 여담으로 G. H. 하디는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 갈루아는 21세에 죽었고, 아벨은 27세에 죽었으며, 라마누잔은 33세, 리만은 40세에 죽었다.(사실 갈루아는 20세에 죽었고, 아벨은 26세에 죽었으며, 라마누잔은 32세, 리만은 39세에 사망했다. 하디가 이들의 향년을 조금씩 잘못 알고 있었는데, 생일을 정확히 고려하지 않고 연도로만 대충 계산하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40이 넘어서 수학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쌓은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가우스는 50세에 미분 기하학 책을 출판하였다. 물론 미분 기하학에 대한 근본적인 아이디어는 그 책이 출판되기 10년 전에 이미 가우스가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50세가 넘은 나이에 수학적인 진보를 이룩한 수학자에 대해서는 단 한명도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환갑이 넘은 나이로 [math(zeta(3))]의 값이 무리수임을 증명한 로저 아페리의 사례처럼 노장 수학자가 일을 낸 사례도 있기는 있다. 최근의 사례로는 58세까지 무명의 수학자였다가 58세에 쌍둥이 소수 추측에 대해 뛰어난 업적을 낸 이탕 장이 유명하다. [10] 일례로 실해석학을 공부하다 볼 수 있는 예고로프 정리가 있다. 르베그 가측 함수에 대하여 점별 극한함수와 균등 극한함수가 거의 모든 점에서 일치한다는 내용으로 르베그 지배수렴정리와 같은 맥락에서 자주 다뤄지는 정리인데, 이 증명은 원래 1910년 이탈리아 수학자 카를로 세베리니가 발표했지만 세베리니가 그 증명 논문을 이탈리아어로 내는 바람에 주류 수학자들에게는 깔끔하게 묻혔고, 그 이듬해인 1911년 러시아 수학자 드미트리 예고로프가 프랑스어 논문을 통해 발표한 후에야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졌고 예고로프 정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외에도 수학과 고학년들이 배우는 전공심화 코어 과목에서 이런 사연을 가진 정리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다만 1980년대 이후로는 부르바키 명의의 저술이 많이 뜸해졌다. 마지막으로 니콜라 부르바키 명의의 저술이 나온건 2016년인데, 이 책은 대수위상수학에 관한 책으로, 아직도 영역이 안 되었다. 대부분의 서적들이 프랑스어로도 교과서로 써먹기 어려울만큼의 희한한 문체로 일관하기 때문에 영어 또는 다른 언어로의 번역 역시 오랜 세월에 비하면 지지부진한 편. 부르바키의 문서 작업을 담당했던 장 디외도네가 도움을 준 그로텐디크의 FGA, EGA, SGA 등의 서적 및 강의록이나 피에르 들리뉴 등 그로텐디크의 제자 세대에서 나온 프랑스어 저술 역시 번역 작업은 매우 더디기만 하다. [11] 그렇다고 아주 책을 안 내는 것은 아니다. 홈페이지도 존재하며, 이곳에서 부르바키의 이름으로 최근에도 책을 저술했다는 소식을 확인할 수 있다. [12] 베유나 슈바르츠 등 알자스에서 태어나 독일어가 가능한 이들이 좀 있긴 했지만 그로텐디크를 제외하면 이들도 대개 맥레인과 맞서는 입장이었다. [13] 이 새수학운동이 뭐냐면, 쉽게 말해 청소년들에게도 0.999…=1라는 주장을 체의 공리, 순서공리, 완비성 공리를 만족하는 실수 집합을 구성하고 아르키메데스 성질, 유리수의 조밀성, 데데킨트의 절단 정리, 수열의 극한, 스퀴즈 정리, 단조수렴정리, 집적점, 축소구간정리, ... 등을 도입하고 하나하나 증명해나가며 입증해보이는 등의 철저히 추상적, 공리주의적, 집합론적, 논리적 사고에 기반한 전공자들한테나 알맞는 수학교육론이다. 이는 니콜라 부르바키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스푸트니크 쇼크가 터진 데 따른 나비효과 중 하나로, 미국 및 서구권의 교육계에서는 "학생들을 자유방임으로 방목하듯 기른 결과 기초학력과 기초학문의 부실로 이어져서 빨갱이들에게 뒤쳐지는 치욕스러운 사태가 벌어졌다!"며 진보주의적 교육을 비판하고 철저히 성과지향적, 본질주의적인 교육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 때 철저히 추상적, 구조적 접근을 추구하던 부르바키의 사상이 수학교육학자들에게도 크게 주목받았고, 부르바키의 지향을 똑같이 추구한 결과 인지능력이 충분히 발달하지도 않은 초등학생들에게 기수, 집합을 가르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대치동 올림피아드대비학원 같은 곳에서나 이뤄질 것만 같은) 교육이 이뤄지기 시작했는데 이런 수학교육을 새수학운동 또는 현대수학운동이라 한다. 부르바키의 뿌리와 학술활동의 주 무대가 파리 고등사범학교인데 이 곳이 근본적으로는 사범대학임을 생각하면 이 새수학운동의 파급효과가 어떠했을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새수학운동은 학문적 엄밀성만을 바라보며 "1보다 크고 5보다 작은 자연수는 2, 3, 4인데 이는 1보다 큰 자연수의 모임과 5보다 작은 자연수의 모임의 교집합에 속하는 원소가 2, 3, 4 뿐이기 때문"이라고 초등학생들에게 집합과 모임이라는게 꼭 같은 뜻이지도 않다는 tmi도 곁들여서 가르치는등 아동, 청소년들의 성장주기에 맞춘 심리학적 분석을 경시하고 인지능력을 넘어서는 무리한 교육을 추구한 결과 일찍부터 수학에 대한 정나미가 떨어지고 이후로도 흥미를 붙이지 못한 바칼로레아 수험생 태반이 낙제점 수준의 수포자로 드러나는등의 체계적인 수포자 양산(...)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대한민국의 교육계에서는 제3차 교육과정에 매우 크게 반영되었으며, 역시 서구권에서와 같은 폐단을 낳으며 사장되었다. [14] 이임학이 발견한 리 군(Ree group)은 리 군(Lie group) 중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