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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동(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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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91919><colcolor=#ffffff> 남포동
南浦洞|Nam Po-dong
파일:남포동.jpg
본명 김광일 (金廣一, Kim Gwang-il)
출생 1944년 11월 6일 ([age(1944-11-06)]세)
경상남도 부산부
데뷔 1965년 영화 '나도 연애할 수 있다'

1. 개요2. 출연 작품
2.1. 영화2.2. 드라마
3. 수상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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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배우.

1970 ~ 90년대에 연극과 영화에서 코믹한 연기의 감초 조역으로 주로 활동했다.

원래는 배우가 아니라 영화사 직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하여 제작부장까지 된 건데, 사회가 가난했던 당시의 인력난으로 부족한 단역[1] 때우기로 몇 번 맡으며 직원일을 하다가 본인도 모르게 경험이 쌓여 중년쯤부터는 전문 조연 배우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최민수도 어렸을 때 부친이자 당대 최고 스타 최무룡을 데리러 집으로 온 제작부장 남포동을 본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는 영화 시스템이 주먹구구식이라 스타 배우가 영화 네다섯편을 동시에 찍던 형태에 매니저 시스템도 약해서[2] 스케쥴 사전협의 정리도 잘 안 되던 시대라 아침마다 빨리 주연배우를 데려가서 최대한 많은 장면을 찍으면 영화를 빨리 개봉해서 수익을 볼 수 있는 형태였기에 제작부장들이 스타배우를 설득해서 다른 영화사보다 먼저 데려가는 게[3] 중요한 임무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스크린에 사라졌는데, 부인이 주식투자 사기를 당해 수십억 전재산을 날리고, 남포동 본인의 사업도 실패해 이혼 후 가정이 파탄나 생활고를 겪고 모텔방을 전전하고 있음이 밝혀져 세간에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간암까지 걸렸으나, 다행히 지인들의 도움으로 간이식 수술을 받아 건강을 회복했다.

여담으로, 울랄라세션 김명훈과 좀 닮은 편인데[4] 김명훈 본인도 닮았다고 인정했다.

2번의 이혼과 사업 실패로 형편이 어려워져 막내딸과는 단절되었다고 한다. 죽기 전에 얼굴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2024년 1월 5일, 경상남도 창녕군의 한 주차장에서 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돼 119에 극적으로 구조됐다. 차량 내부에서는 술병과 잿가루가 담긴 양동이가 발견됐다. #

2. 출연 작품

2.1. 영화

2.2. 드라마

3. 수상

4. 관련 문서


[1] 요즘이야 명품 조연 배우도 부유한 경우가 있지만, 당시는 출연료가 워낙 적었기에 주연은 물론 조연은 더 먹고 살기 힘들어서 누구든 투잡을 뛰는 게 다반사였을 정도였다. 게다가 연예인을 지금의 어그로 영상으로나 먹고 사는 저질 유튜버 정도가 받는 대우 정도로 비하하며 딴따라라고 무시하고 멸시하고 괄시하고 깔보던 시절이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소액이라도 받는 조연에 비하면 돈조차도 거의 못 받는 단역은 지원하는 사람도 적어 항상 부족해서 얼굴도 제대로 안 나오는 역할은 영화사 직원이나 지인, 어떤 때는 사람이 너무 안 구해져서 심지어 연기를 전공한 적도 해 본 적도 없는 지나가던 일반인을 돈 주고 꼬셔서 때우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2] 수행기사 정도만 있었지 지금처럼 계약협의나 관리를 해 주는 매니저는 없었다. 진짜 크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업계에서 은퇴한 중진 관계자가 마치 변호사 계약하는 식으로 한두달 의뢰받아 협상대행 및 배우 관리 하는 정도는 있었지만, 수십년간 극소수의 예외였다. 어차피 그만큼 나눠줄 출연료 규모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런 중진 임시 매니저 케이스는 80년대 전성기 때 해외 광고 촬영 때만 은퇴한 노년의 유명 방송 작가를 매니저로 계약했던 심형래. [3] 80 ~ 90년대 연예기획사 관계자 중 조폭이 있었던 것도 6070시대 이때의 흐름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설득이 안 되면 연예인을 싫다고 해도 상관없이 억지로 협박해야 했고, 반대측은 이를 막아야 했기 때문에 양쪽 다 조폭이 필요해진 것. 연예계 매니지먼트가 강화된 것도 이때의 반작용이었다. 연예계가 점차 위상이 높아지면서 연예 활동 외적으로 이와 같은 연예인의 스트레스 관리 필요성이 중요해졌기 때문. 80년대만 해도 매니저를 안 두는 연예인도 꽤 많았고, 설령 있는 매니저들도 지금 매니저들처럼 많은 부분을 관리하지 않았고, 대부분 전문 매니저가 아니라 전직 무명 혹은 한물 가거나 많이 뜨지 못한 2/3류 연예인, 전직 방송작가, 전직 PD 등 전직 연예계 관계자들이 은퇴 전에 만든 인맥을 이용하여 본인 연예인을 방송이나 영화, 행사에 꽂아주는 정도의 역할만 했고, 연예인 본인이 자기관리를 손수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출연료 협상도 본인이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매니저 체계를 처음 제대로 만든 사람이 김완선의 이모이자 1980년대 중후반 인순이의 매니저 한백희였다. 하지만 한백희가 키운 슈퍼스타 김완선이 등장해서 가요계를 휩쓸고도 연예계가 바로 바뀐 건 아니었고, 동세대 연예인들은 여전히 부족한 매니지먼트를 받으며 살거나 일부는 또 그냥 혼자 활동하는 등 조금씩만 변하다가 1990년대 H.O.T. 때의 이수만이 완벽한 관리시스템을 만들어 가져가면서 연예계 전체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4] 슈퍼스타K3 슈퍼위크 당시 김명훈이 심사위원 윤종신에게 배우 남포동을 닮았다고 들었다. 외모 뿐만 아니라 노래 실력도 닮았다고 들었는데, 실제 남포동 본인도 노래를 잘 한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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