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1:56:47

김정덕

귀암에서 넘어옴
김정덕
金正德 | Kim Jeong-deok
파일:external/www.dsb.kr/1228643372-22.jpg
<colbgcolor=#315288><colcolor=#ffffff> 출생 1947년 7월 1일
전라북도 이리부(현 익산시)
사망 2015년 1월 20일 (향년 67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본관 사천 김씨
귀암(龜巖)
학력 남성고등학교 (졸업)
공주사범대학[1] (국어교육 / 학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한문학 / 석사)[2]
경력 육군공병학교 교관
천안고등학교 교사
영동고등학교 교사

1. 개요2. 이력3. 야갤에서4. 타계와 그 이후5. 기타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귀암 김정덕 선생님은 모든 것을 알아요.
대한민국의 교사이자 국내야구 갤러리에서 유래한 낚시글 중 하나의 주인공. 유래가 유래인 만큼 야민정음에 힘입어 '커암', '커암센세', '커암 숲정틱', '커ㅇ占' 이라 불리기도 한다.

2. 이력

전라북도 이리 출신,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소재 영동고등학교 국어교사, 중국어교사로 재직했다가 정년퇴임했다고 한다. 김정덕 선생님인 이유가 진짜 고등학교 선생님이어서였다.

귀암의 수업을 들었던 한 갤러의 증언에 따르면, 공주사대(현 국립공주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젊은 나이에 ROTC 8기(1970년 임관) 출신 공병 장교로서 1961년 5.16 군사정변 참여했다고 한다.[3] 수업 중에 자신을 예수[4],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5]에 이어 을 가르친 '세계 5대 성인'으로 칭한다고 한다. 국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중국어를 포함한 5개국어(본인이 주장한 5개국어 + C언어)에 능하다고 하며[6], 이따금 시를 낭송하거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영동고 동문들중 귀암에게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에 증언에 따르면 중국어 실력은 초등학생 수준이라고 한다.[7][8][9] 매 학기 수업이 끝나면 본인이 부른 노래를 녹음한 음악 CD[10]를 학생들에게 배포했다고 한다. 키는 좀 작아서 그냥 평범한 사이즈의 넥타이를 매어도 그게 벨트 밑까지 닿았다고 한다. 그래도 비율이 좋지가 않아서 그렇지 장교 출신이니만큼 160cm는 넘었을 것이다.[11]

전공은 국어선생인데 정작 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가르친 건 절대로 시험에 안 내는 기행에 빡친 학부모와 학교가 내쫓으려 했는데 단식투쟁해서 학교에 남았다는 전설이 있다. 왜 전설이냐면 단식투쟁 중 수위실에 숨어서 짜장면 시켜먹다 걸려서. 어느 사립고에나 하나 둘씩은 있는 괴팍한 선생이었던 듯. 학교 측에서는 늙은 교사를 함부로 내쫓을 수가 없어서 버로우. 거기다 영동고를 세운 창립자와 깊은 인연이 있어서 함부로 내쫓기도 힘들어서, 할 수 없이 재단 측에서 중요 교과목과 관련 없는 과목을 억지로 만들어내서 맡겼다고 한다. 그나마 귀암이 중국어를 할 줄 알았던고로 아예 주요과목인 국어에서 제2외국어인 중국어로 내쫓은 것. 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온 교사 시절의 귀암. 그리고 교사로서는 2009년 1학기까지 마치고 8월에 정년퇴임했다.[12] 정년퇴임 후에는 신학을 배운 뒤 목회자가 되어 종교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 목회자 활동 역시 신학을 배운 기간을 제외하면 길지는 않다. 2015년이 시작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이다.

영동고등학교 댄스동아리 '스톰'의 개설자이기도 하다. 처음 동아리 개설 전 3학년 학생들이 타 학교와는 달리 영동고에 변변한 댄스동아리가 없으니 댄스동아리를 만들어달라고 단체로 졸랐는데, 그중 지나가던 김정덕 선생님께서 좋은 생각이라며 학교 측에 동아리 개설을 승인시켜달라 요청,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높으신 분의 인맥으로 들어온 인물인 만큼 학교 내에서 하는 일에 비해서 위상은 높은 편이었을 것이다.

운전면허가 없어서 출퇴근용 교통수단으로 주로 택시를 타고 다녔다고 하며, 한 달에 무려 55만 원 넘게 택시비 지출액이 나왔다고 한다. 타계 전까지 그가 살았던 거주지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당시 수지읍 신리)이었는데, 영동고에서 이 거리는 현재 택시 기본요금으로 편도만 대략 3만 원 정도 나온다. 귀암이 재직중일 당시 서울시와 경기도의 택시 기본요금을 감안하면(1600원~2400원 정도. 물가상승률도 포함해서) 한번 출퇴근할 때마다 왕복 4~5만 원 정도 나왔던 셈이다.[13]

3. 야갤에서

이렇게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교사가 한 야갤러의 무자비한 낚시로 인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 2020년 요즘에도 네이버에서 귀암, 김정덕, 커암 등등을 치면 '귀암 김정덕 선생님은 모든 것을 알아요'가 자동완성되며 결과도 그에 대해 주로 나온다. 심지어 아래 소항목을 보면 실제 야갤러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 악명 높인 낚시글은 힛갤에 올라간 글 중에서 유동닉이 쓴 글의 비밀번호[14] 브루트 포스 기법으로 알아내어 글의 내용을 지우고, 거기에 귀암(龜巖) 김정덕 선생의 전자시집과 사진을 첨부한 뒤 귀암 김정덕 선생님은 모든 것을 알아요라는 문구를 써 놓는 낚시글이었다. 원래 유행하던 낚시글인 ' 엑소의 시우민은 아무것도 몰라요ㅎ'의 안티테제. 개념글만 가끔 보는 식으로 갤질을 하던 야갤러들은 한창 전성기일 땐 클릭하는 개념글마다 커암센세가 등판해서 몹시 빡이 쳤다 카더라. 글을 클릭하자마자 자비 없이 자동재생되는, 불경낭송( 반야심경 같은) 테이프 같은 데서 브금으로 나올 법한 국악 연주곡, 이어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중국 가요, 인터넷 초창기 다음 카페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자비 없이 눈뽕을 일으키는 플래시로 된 시집[15] 릭롤링의 일종이라고 봐도 무방.[16] 사이키델릭하면서도 중년 폭풍간지가 충만한 김정덕 선생의 존안이 컬트적인 인기를 얻어 다른 갤러리로 퍼져나갔다.

자세한 것을 보고 싶으면 프로필 사진이 실린 버전. 그중에서도 자주 게재되는 국악 브금이 곁들여진 버전 BGM 주의. 대부분 본인이 직접 낭독, 낭송한 시집이다. 개인 홈페이지도 있다. #

귀암 선생이 직접 부른 등려군의 야래향 듣기

2014년도 초중반까지 활발하게 등판하다가 한동안 잠잠했다. 야카오톡을 빙자한 커플들의 염장글이나, 야갤럼을 피꺼솟하는 조롱짤들이 올라올 때마다 야갤러들은 커암센세를 애타게 찾았으나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2014년도 12월 1일부터 다시 등판하기 시작하여, 야갤럼들 피꺼솟하는 짤들을 친히 세탁해주어 야갤러들은 안심하고 발뻗고 잠에 들 수 있었다 카더라.

4. 타계와 그 이후

그러던 중 2015년도에 갑작스레 부고가 나왔다. 1월 20일에 숙환으로 별세. 발인은 1월 22일 목요일 오전 7시 30분 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서 치러졌다.

그런데 별세 전, 2014년 12월 30일에 개인 홈페이지에 직접 작성한 글에서 야갤을 언급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심지어 C언어를 이용한 자동 세탁 매크로 프로그램을 제작하셨다고 한다. 해당 글

이를 토대로 볼 때, 야갤 개념글을 세탁하던 사람들 중에는 적어도 진짜 귀암의 소행이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 애제자가 제출한 애니메이션의 감상문을 포스팅할 예정이었으나, 몸 상태가 급속히 나빠지는 바람에 포스팅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들을 안 야갤러들이 귀암 선생의 카페를 뒤늦게 뒤져 찾아낸 글 중에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를 언급하는 글까지 있었다. 해당 글

그러나 글의 문맥으로 볼 때, 야갤러들이 조승희를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조승희를 진짜 인종차별에 항거한 애국 청년으로 오해한 것으로 추측된다.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사진과 함께 조승희의 사진을 올려둔 것도 이런 이유로 추정.

김정덕 선생님이 운영하던 카페의 후임 운영자를 구한다는 공지가 있었지만, 수개월이 지난 2015년 9월 현재까지 카페지기가 김정덕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 후임 운영자를 구하지 못한 모양이다. 글도 거의 다 끊겼다. 그나마 폭파되지 않은 것이 위안.

한편 그의 별세 이후로도 힛갤에 올라온 몇몇 글들이 귀암의 시집으로 세탁되는 일이 종종 있어 왔다. 그러나 전성기였던 2014년에 비하면 등판하는 빈도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실제로도 야갤에 등판했을 가능성이 높은 귀암 본인이 사망한 탓도 있겠지만, 불귀의 객이 된 사람이니만큼 그동안 꾸준히 개념글을 세탁해 온 다른 사람 또한 이제 슬슬 그를 편히 놓아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다만 사망 이후에도 문서 상단에 나온 것과 비슷한 모자를 쓴 경우나 비슷한 포즈를 취하는 경우 커암이라 불리는 용례가 있다. 이를테면, 소녀전선에서 문서 상단의 사진하고 구도가 비슷한 인형 별명은 커암센세이다.

5. 기타

2015년에 사망하여 고인이며, 추억보정까지 겹쳐 문서가 비교적 익살스럽게 작성되었지만, 정작 귀암 선생에게 배운 학생들에겐 좋은 인상 같은 건 없다.

전형적인 사립학교의 낙하산 인사였던 터라 교수 능력이 너무 딸렸던 것이 크고[17] 괴팍한 성격도 한 몫 했다. 제자들에게도 '국어 선생님'이나 '중국어 선생님', '김정덕 선생님'대신 '귀암 선생님'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으며, 누구도 믿지 않을, 예를 들면 5.16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식의 뻔한 허풍을 너무 진지하게 하다 보니 학생들 사이에선 좋게 말해도 자뻑 심하고 자기 잘난 맛에 사시는 기인 정도였다.

잡학지식은 분명 많은 것 같은데[18], 그게 진도랑 하등 관련없는 이야기라서 어느 순간 수업내용은 버려지고 삼천포로 빠져서 지식자랑으로 끝내는 날이 많았다. 영동고가 교육열로 유명한 강남 8학군 소재의 학교라는 점에서 학생들은 수업을 순 가라로 하고, 기행을 일삼는 귀암 선생을 좋게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귀암의 수업시간, 쓸데없는 이야기가 듣기 싫다고 그를 무시하고 수업과는 상관없이 그냥 자습하던 학생도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런 학생들을 제지하거나 폭언이나 폭행은 타 선생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귀암 선생이 젊은 시절에는 초등학교 교사들도 대놓고 학생들을 쥐잡듯이 매를 들어서 때렸고, 중~고등학교 교사들도 빠따질을 하던 시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 의외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해달라고 보채는 등 물리적 수단 대신 정신적 공격을 가한 셈.

6. 관련 문서


[1] 국립공주대학교 사범대학 [2] # [3] 귀암의 생년이 1947년이 맞다면 1961년에는 중학생이었을 때다. 공병장교, 그것도 불도저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새마을운동 등으로 일어난 국가단위의 개발 산업에 참여한 경력 을 부풀리고 살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학군사관 출신 장교는 1기가 1963년 임관이므로 절대로 5.16 군사정변에 참여할 수 없다. [4] 정확히는 항상 예수를 지져스 크라이스트라고 불렀다. 예수라고 말한 적은 드물었다. [5] 또는 무함마드. 세계 6대 성인들을 얘기할 때 예수와 석가모니, 공자는 늘 고정멘트였으나 소크라테스와 무함마드(귀암은 잘못된 표기인 마호메트라 말하였다.)는 수업 때마다 달리 말하였다. 어쩔 때는 세계 7대 성인이라며 둘 다 말한 적도 있었고. [6] 의외의 사실이지만 놀랍게도 컴퓨터 실력은 귀암의 나이를 감안하면, 당시 귀암의 또래 연령층들이 컴맹이 많았을 시절을 감안하면 꽤 훌륭했다. 이따금 컴퓨터공학과 졸업반 학생이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퀄리티의, 또는 초짜 프로그래머의 프로그램들을 뛰어넘는 프로그램/툴을 제작할 정도로 프로그래밍 실력이 있었다. 당장 디시인사이드 지우개의 초창기 프로그램도 이 분이 만들었다고 한다. 프로그래밍에 제대로 마음먹고 배웠으면 꽤 실력있는 제작자가 되었을지도? [7] 그가 개인 홈페이지 프로필에 적어놓은 중국어 명언을 해석한 글귀인 '넘어지고 거꾸러져도 다시 일어나라'라는 말은 해석이 거창할 뿐 중국어 원문은 '넘어지면 일어나라'라는 단순한 뜻이다. [8] 근데 이와 별개로 또 중국어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는 졸업생들의 의견도 있는 것을 봐선 초등학생 수준이란 건 중국인 초등학생 수준으로 봤을 가능성이 높다. 영어의 경우 잘 봐줘야 아무래도 장교 출신답게 '그냥 적당히 좀 하는 수준' 정도인 중급 실력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중국어 실력은 자타 공인 실력자라는 평이 꽤 많았다. [9] 그런데 사실은 영어와 달리 중국어는 생활에서 접하기도 쉽지 않고, 반공 기조 때문에 대만과 수교한 기간이 더 길었다. 생각보다 중국과 정식 수교한 역사는 길지 않다. 그전에는 표준어와 거리가 먼 광동화로 된 홍콩 영화가 한국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중국의 전부였고 중국에서 유학하거나 공부했다면 대부분 국민당 치하 대만을 얘기하는 것이였다. 한때 중국어 교육 붐도 장쩌민 재임 시절 화해 무드 분위기에 힘입어 '베이징 올림픽 전후로 중국을 배우자'라는 움직임 때문에 일시적으로 늘었는데 당시 학생들은 그 이전 세대들이니 중국어를 배운 전공자나 실력자가 있을 리는 없을 테고 귀암의 생전 중국어 노래 영상이나 상술한 초등학생 작문 수준의 중국어 어휘력을 봐도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지만 세세히 파고 들면 잘한다고 보기는 힘든 수준이 명확하다. [10] 1990년대 후반 이전에는 디스켓 또는 카세트테이프로 주었다. [11] 대략 눈대중으로 160~162cm정도는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사람이 어떻게 장교출신이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체형이 영 좋다고 보긴 어려워서, 이 분이 재직 당시 대다수 신입생들이 입학식에서 첫인상에서 평하길 웬 땅딸보가 있냐는 반응과 비웃음이 태반이었다. [12] 웃대에 올라온 글을 토대로 수정. 애초에 47년생인 귀암 선생의 정년은 만 62세인데, 2012년까지 근무한다면 정년을 넘겨서도 근무한 것이 된다. 비록 설립자와 인연이 있었다고는 해도 학교 측이 귀암 선생의 명성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정년만 보장해주고 퇴직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13] 물론 수지구에서 강남구까지 올라오는 버스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귀암 선생은 택시만을 고집했다. [14] 주로 1111, 1234 등 아무렇게나 단순히 쓰인 케이스 [15] 개중에는 예라이썅[19]처럼 그냥 멀쩡한 중국 노래를 가져다가 자기 식대로 번역해놓은 것도 있다. [16] 이때문에 앞서 중국어 실력에 의문이 있었다. 회화는 잘하였지만, 오버해서 의역하는 게 많아서, 당시 중국어를 잘하는 재학생들에게 귀암의 중국어 실력에 약간의 논란이 생겼던 것. [17] 여느 고등학교 수업처럼 교과서 따위는 장식이었고, 웬만한 수업들이 그렇듯이 귀암 선생님 역시 참고서로 수업했고 시험문제는 참고서에 실려있는 문제를 그대로 베껴서 냈다고 한다. 그리고 수업 때마다 칠판의 판서의 3분의 1이 한자와 외국어라서 전교 등수의 애들을 포함 많은 이의 원한을 샀다고 한다. 가르친 내용을 절대 시험에 내지 않는 것은 그의 기본 소양이었고, 시험 감독을 맡으면 하라는 시험감독은 안 하고 뜬금없이 주번을 부른 뒤 걸레를 가져오라해놓고 주번을 안 시키고 직접 자신이 더러운 곳을 청소하는 등 이런 괴팍한 행동을 하여 그가 시험감독으로 들어갔던 반 학생들이 중간고사 기말고사 때 대놓고 부정행위를 할 좋은 기회를 주었다. 또한 이러한 부정행위가 있음에도 제재는커녕 주동자 및 부정행위 참여자를 잡지도 않고 수수방관하여 직무유기 논란까지 있었다. 일부 사립학교는 이런 식으로 인사적체 문제가 심각한 편이다. 고령이라 교수능력은 물론 자기 과목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는(특히 같은 항목을 담당하는 상대적으로 젊은 교사나 교생들에게 짬시키는 사람도 있다.) 노교사들도 학교와 오랜 연이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정년을 넘어 철밥통처럼 근무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교사 자격이 없거나, 과거 교사였으나 다른 직종으로 전직했다가 은퇴 후 할 게 없어 교문을 기웃거리다가 파트타임식으로 이런저런 낙하산 인사들이 어른의 사정으로 한두명씩은 학교에 꼭 존재한다. [18] 현직 교사에, 상술한 C언어 관련 이야기를 봐서 머리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결국 관종끼 성향이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