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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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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사시대2. 고대3. 고려 ~ 조선4. 대한제국5. 일제강점기6. 대한민국

1. 선사시대

산달도 패총에 빗살무늬 토기 등의 신석기 유물, 소동리에 간돌칼, 사등면에 남방식 고인돌 등 여러 유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 문화가 육지 못지 않게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고대

삼한시대 초기에는 변한의 영역이었는데, 거제에 독로국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1]

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후 677년에 문무왕이 거제에 상군(裳郡)을 두었다. 이 당시 상군의 관소는 사등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지금까지 사용하는 이름인 거제군으로 고치고 속현으로 아주현(아주동), 남수현(南垂縣, 현 남부면), 명진현을 관할했다. 신라 9주 5소경 중에서 지금의 진주시를 중심으로 한 강주에 포함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성왕 원년(799년) 청주 거로현을 학생녹읍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청주 거로현은 지금의 거제도에 해당하는 곳이다.

고대부터 일본을 왕래하는 길목으로서[2] 변한 ‧ 가야 시절에는 한 군현 ‧ 일본과 교역하는 항로였다. 김해 등지에서 생산된 철은 낙랑 대방으로 갈 땐 견내량을 지나 서진하고 일본으로 갈 땐 거제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 지세포 부근에서 대마도로 건너갔다.[3][4]

이는 대한해협의 강한 해류와 편서풍으로 인해 대마도에 도달하지 못하고 동해로 떠내려가 버리는 위험이 커서 대마도와 가까우면서도 최대한 남쪽인 거제 남단에서 출발하는게 안전했기 때문이다. 또 해류를 타고 가기 때문에 항해 속도도 빨랐다. 돌아올 때는 대마도 남단에서 출발하여 거제도 남단에 도착한 뒤 해안선을 따라 김해 창원 통영 등지로 이동하는 것이 기본 항로였다. 이 항로는 조선 전기까지 지속되어 여말선초 무렵에도 정몽주, 신숙주 등 초기 통신사는 부산이 아닌 거제의 지세포나 다대포를 통해 일본을 오갔다.[5] 이때 방문한 통신사들은 거제의 인상깊은 절경을 보고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 # #

3. 고려 ~ 조선

고려 조선시대에는 개성과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의 길목이자 이를 노리는 왜적을 방어할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고 군마와 목재도 생산하였다. 원나라의 일본원정 때는 견내량과 동부면이 원나라에 동원된 고려 수군의 진영이었다. 한때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주민이 비기도 했지만 왜구를 물리친 수군이 주둔하면서 원래 모습을 찾았고 3차에 걸친 대마도 원정(1389년 창왕, 1396년 조선 태종, 1419년 세종) 때 원정군의 출정지가 되기도 했다. 조선 태종은 이 수군을 개편하여 산련포와[6] 탑포를 거쳐 오아포에 경상우수영을 설치하고 수많은 예하 진을 두었다.[7]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축성도 많이 이루어져 거제읍성인 고현성을 비롯해 둔덕기성, 지세포성, 옥산금성, 가배량성, 구조라성, 오량성 등의 평지성과 다대산성, 탑포산성, 중금산성 등의 산성을 포함해 24개의 성이 남아 있어 다양한 시대의 성들을 볼 수 있다.

섬인 데다 상주한 군영이 많아 관리 ‧ 감시가 용이하다 보니 유배의 역사가 깊다. 무신정변이 일어난 고려 중기와 역성혁명이 일어난 조선 건국 시기에 이주된 고려 왕족들의 집단 거주지였으며 의종이 거제 둔덕기성에 폐위되었다. 의종을 향해 부른 고려가요 정과정의 작가 정서나 연산군 사화를 겪은 김세필과 이행, 예송을 겪은 송시열과 이행, 최숙생, 정황, 김진규, 김창집, 이유원 등 수많은 인물들의 유배지이자 유배문학의 고장이기도 하다.[8]

임진왜란 시기에는 옥포 해전, 율포 해전, 한산도 대첩, 장문포 해전, 칠천량 해전 등의 전투가 벌어진 격전지였다. 옥포 해전에서 배를 잃은 일본군들은 고현성을 함락시켜 이때부터 경상우수영 인근에 위치한 거제면이 중심지가 되었고, 북쪽 해안선에는 일본군이 축성한 영등포왜성, 송진포왜성, 장문포왜성, 견내량왜성이 남아 있다.

1663년(조선 현종 4년)에 관아를 현재의 거제면으로 이전하였고[9], 1895년 고종 때 거제군이 되었다.

3.1. 옥포 해전

파일:옥포해전1.jpg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의 첫 승전이다. 1592년(선조 25) 5월 7일 옥포(지금의 옥포동)[10] 앞바다에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일본의 도도 다카토라의 함대를 무찌른 해전이다. 이순신은 휘하의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을 이끌고 5월 7일 낮 12시경 조선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50여 척을 발견하고 이를 동서로 포위해서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선들에게 맹렬히 포격을 가해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이 싸움의 결과 아군은 별 피해 없이 적선 26척을 격침하는 큰 전과를 올려 최초의 해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3.2. 칠천량 해전

1597년(선조 30) 7월 15일 거제 칠천도에서 벌어진 해전. 조선 수군이 무참히 깨진 전투로 역대 패전사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 국군에선 병자호란 쌍령 전투, 한국 전쟁 현리 전투와 함께 한국사 3대 패전 중 하나로 꼽고 있다.

임진왜란 일본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다시 진주한 가운데, 1월 21일 원균이 장계를 올려 이순신을 까자 선조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하고 도성으로 압송하라고 명하고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고 벌였다가 대패한 해전이 칠천량 해전이다.

이 연고로 거제시는 하청면 칠천도에 칠천량해전공원과 전시관을 만들었다. 원균을 미화하는 시설은 절대 아니고, 패배도 역사이니 기억하자는 목적에 충실한 편이다. 다만 옥의 티라면, 다른 배경 설명은 왜곡하지 않고 기록에 충실하게 고증했는데 정작 해전의 패배 자체를 '칠천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조선 수군이 그 자리에서 궤멸했다'라는 통념에 가깝게 설명했다.[11] 칠천량 해전의 내용은 해당 문서에 나와 있다.

4. 대한제국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은 송진포를 무단 침탈해 해군기지를 세우면서[12] 거제전역이 요새화 되었다.

5. 일제강점기

1914년 일제에 의해 통영군에 통합되어 버린 흑역사가 있다.

장승포를 어업기지로 삼아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이 때문에 장승포와 지심도[13]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군의 공습을 받기도 했다. # #

6. 대한민국

해방 이후 6.25 전쟁 때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남단 방어선이었고 거제 둔덕에 집결해 거제 방어 임무를 맡은 국군이 통영 상륙 작전을 성공하였다. # 흥남 철수 작전에서 배를 타고 월남한 15만 실향민의 터전이[14] 되었고 1951년에는 지금의 고현동과 수양동 지역에 17만의 전쟁포로를 수용한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다. "중립국...중립국" 이란 대화로 잘 알려진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공간적 배경이기도 하다.

1953년 통영군에서 다시 거제군으로 분리되어 나왔다. 1954년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통영군 을 이라는 선거구명으로 선거가 치러졌으며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야 통영군 을 선거구가 거제군 선거구로 개편되었다. 1963년 일운면 고현출장소가 신현면으로 분리되었고, 1979년 신현면이 신현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장승포읍이 시로 승격되어 장승포시로 떨어져 나갔다.[15] 이후 1995년 시, 군 통합 때 거제군 장승포시를 다시 합쳐 거제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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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로국이 부산 지역이라는 설도 있지만 부산을 제외한 타 지역 학계(중국 포함)에서는 거제로 보고 있다. 독로국은 거제다, 거제도는 삼한시대 '독로국'이었다 삼한시대 두로국설 거제냐 동래냐 [2] 거제(巨濟) 뜻은 '크게 건너다'로 고대부터 일본을 왕래하던 지역이란 특징이 잘 반영된 지명이다. 또 제(濟)가 구하다란 뜻도 있어 '크게 구하다'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임진왜란의 격전지이자 6.25 전쟁 시 흥남철수의 피난처였음을 보면 어울리는 지명이다. [3]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거제도를 가야 가라로 가는 섬이라는 뜻인지 옛부터 카라시마라고 불렀다. [4]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던 서불도 와현에서 머물다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전해진다. [5] 고려는 1292년이 최초의 기록으로 여러차례 거제를 거쳐 일본을 방문했다. 조선의 일본 공식사절 방문은 총 30회로써 이 중에 18회가 거제에서 출발했다. [6] 산달도 [7] 오아포는 동부면 가배리. 거제 해안선을 따라 수많은 성과 수군 진영이 들어서 있었으며 경상우수군은 보유 함선과 병력에 있어 조선 수군 중 가장 규모가 컸다. 거제는 1418년 무렵 합포에서 이전하여 임진왜란 이후인 1604년 통영 두룡포로 이전할 때까지 186년간 경상우수영 소재지였다. [8] 역사상 거제로 유배된 인물들은 500여 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고 이들은 1400여 작품을 남겼다. 거제 토박이 성씨 중에 왕(王) 씨의 변형으로 많이 쓴 전(全), 옥(玉), 윤(尹) 씨 비율이 유독 높다. [9] 거제면은 오랫동안 우수영 관할 지역이었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거제면이 중심지로 변모하고 우수영이 통영으로 옮겨가면서 고현에 있던 관아도 이전하게 되었다. 거제현의 질청은 소실되었지만 객사로 쓰인 기성관이 남아 있는데 군영으로도 쓰였던 곳이라 규모가 크다. 주변에는 거제향교 반곡서원 같은 경남에서도 손꼽히는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10] 이후 옥포만 바로 옆에 아주동이 있는데 이곳 앞바다에 거북모양을 받침으로 한 충무공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곳에 대우조선해양이 들어서면서 이 충무공비는 대우조선부근(육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기념탐의 비문에는 노산 이은상의 시문이 기록되어 있다. [11] 원균의 함대는 칠천량에서 싸우다 서쪽으로 퇴각하여 현 통영시 광도면과 고성 해안에 상륙한 뒤 추격하는 일본군에게 궤멸한다. [12] 송진포는 외해로부터 위치를 숨기기 좋고 뒤편 안산에 올라서면 대한해협 탐망이 가능하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축성된 송진포왜성이 있고 직선으로 1.5km 거리에 장문포 왜성이 마주보고 있는데 조선수군이 이곳을 공격해 장문포 해전이 벌어진 것을 보면 여러모로 전략적 요충지인 듯. 또 1935년 도고 헤이하치로의 자필을 세긴 러일전쟁 승전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졌는데 해방 이후 뽑혔고 거제시청에서 보관 중이다. # # [13] 지심도는 일본군 주둔 흔적이 남아 있다. [14] 14500명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 등의 상선과 LST 수송함들이 장승포에 입항하는 등 15만 명의 피란민이 거제로 이동해 왔다. 문재인 대통령의 출생지가 거제인 것도 이 때문이며, 실제로 문재인의 원적도 흥남시이다. [15] 같은 날 부산직할시 북구 대저동 일대도 강서구로 분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