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0:20:04

게리 스피드

개리 스피드에서 넘어옴
게리 스피드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6대
클럽
파일:셰필드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25대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배리 혼
(1992~1997)
게리 스피드
(1997~2004)
라이언 긱스
(2004~2007)
}}} ||
게리 스피드의 수상 이력
{{{#!folding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PFA_UK_logo.png
}}} ||
웨일스의 前 축구감독
파일:external/i1.walesonline.co.uk/gary-speed-as-manager-of-wales-image-1-511204481.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게리 스피드
Gary Speed MBE
본명 게리 앤드류 스피드
Gary Andrew Speed
출생 1969년 9월 8일
영국 웨일스 플린트셔주 멘코트
사망 2011년 11월 27일 (향년 42세)
영국 잉글랜드 체셔주 헌팅턴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웨일스|]][[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직업 축구 선수 (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리즈 유나이티드 FC (1984~1988 / 유스)
리즈 유나이티드 FC (1988~1996)
에버튼 FC (1996~1998)
뉴캐슬 유나이티드 FC (1998~2004)
볼튼 원더러스 FC (2004~2008)
셰필드 유나이티드 FC (2008~2010)
감독 셰필드 유나이티드 FC (2010)
웨일스 대표팀 (2010~2011)
국가대표 85경기 7골 ( 웨일스 / 1990~2004)

1. 개요2. 선수 경력
2.1. 리즈 유나이티드2.2. 에버튼2.3. 뉴캐슬 유나이티드2.4. 볼튼 원더러스2.5. 국가대표
3. 감독 경력4. 갑작스런 자살
4.1. 의문점: 자살 동기를 알 수 없다
5. 수상
5.1. 클럽5.2. 개인

[clearfix]

1. 개요

영국( 웨일스)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0년부터 2011년까지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그는 90년대 잉글랜드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였다. 스피드는 리즈 유나이티드, 뉴캐슬, 볼튼에서 자신의 전성기를 보냈으며 웨일즈 국가대표팀 선수로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다. 그는 EPL 개막 이래 라이언 긱스 데이비드 제임스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경기를 뛸 정도로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하게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던 레전드였다. 그러나 선수 생활을 정리한 뒤 불과 1년 만에 극단적인 선택을 해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안겼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2. 선수 경력

2.1. 리즈 유나이티드

파일:external/i.telegraph.co.uk/GARY_SPEED_LEEDS_2068187a.png

스피드는 1969년 9월 8일 웨일즈의 플린트셔 주 멘코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워든 고등학교에 입학했고(훗날 마이클 오언도 이 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같은 동네 출신이었던 케빈 레드클리프가 에버튼의 주장으로서 활약하는 것을 동경하여 에버튼 팬으로 활동했다. 그는 학교에서 축구와 크리켓을 병행했고 그 중 축구를 택하고 리즈 유스팀에 입단했다.

스피드는 1988년 6월 학교를 졸업하고 1988년 6월 13일 리즈 유나이티드와 프로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리즈의 감독이었던 하워드 윌킨슨은 유스팀에서 레프트백으로 활동하고 있던 스피드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고 그를 중용하기 시작했다. 스피드는 19살의 나이에 2부리그에서 올더햄을 상대로 출전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후 스피드는 리즈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선수가 되었다. 윌킨슨 감독은 스피드가 멀티플레이어로서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간파하고 레프트백, 중미, 레프트 윙어, 그리고 공격형 미드필더를 번갈아 수행하게 했다. 그는 이 모든 포지션을 매우 잘 소화했고 찬스를 만들어내고 중요한 순간마다 골결정력도 탁월했다.

하지만 그의 최대 장점은 꾸준함이었다. 스피드는 매 시즌 출장기회를 꾸준히 늘려나갔고 1991-92 시즌엔 42경기 중 41경기를 소화하며 리즈의 1부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리즈에는 고든 스트라칸, 게리 매칼리스터, 데이비드 배티 같은 걸출한 미드필더들이 있었는데, 스피드는 그중 필두로서 거의 모든 경기에 출장해 팀의 호성적을 이끌었다. 이후 스피드는 1992-93 시즌에도 올해의 팀에 포함되는 등 이른 나이에 전성기를 이어갔다. 비록 팀은 1991-92 시즌 리그 우승 이래로 하위권으로 떨어져 매시즌 부진했지만, 스피드는 꾸준히 자신의 진가를 발휘해 팬들의 마음을 달래줬다. 그는 1996년 리그컵 결승전에 진출시켰지만 아스톤빌라에게 아쉽게 패했다. 이렇듯 스피드는 꾸준한 활약을 매시즌 선보이며 리즈에서 312경기에 출전해 57골을 기록했다.

2.2. 에버튼

파일:external/i1.liverpoolecho.co.uk/PA-12176412.jpg

1996년 여름, 스피드는 조 로일 감독의 부름을 받고 3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어린 시절부터 팬이었던 에버튼에 입단했다. 그는 1996년 8월 17일 뉴캐슬을 상대로 에버튼 소속으로서 첫 경기를 뛰었고 11월엔 사우스햄튼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해 팀의 7:1 승리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는 에버튼에서의 첫 시즌에 11골을 기록하며 에버튼 팬이 뽑은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후 1997-98 시즌, 하워드 켄달 조 로일의 뒤를 이어 에버튼 감독으로 부임한 후 그를 에버튼의 주장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갈등을 빛었고 스피드는 1998년 1월 18일에 첼시를 상대로 골을 기록해 3:1 승리를 이끈 후 다음 상대인 웨스트햄과의 원정 경기를 치르기 위해 이동할 버스에 타지 않았고 며칠 간 잠적했다가 2월에 뉴캐슬로 55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이적했다. 에버튼 팬들은 팀의 주장이 시즌 중반에 갑자기 훌쩍 떠난 것에 격노해 스피드를 비난했고 아울러 스피드를 시즌을 치르던 도중에 팔아치운 보드진에게도 거세게 반발했다. 스피드는 이에 대해 별다른 변명을 하지 않다가 나중에 리버풀 에코지에 "내가 왜 그랬는지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에버튼 FC의 명성에 해를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밝혔다.

2.3. 뉴캐슬 유나이티드

파일:external/i2.chroniclelive.co.uk/CD104575.jpg

스피드는 팀의 입단한 후 바로 다음날에 웨스트햄을 상대로 첫 번째로 출전했고 1997-98 시즌 FA컵 6라운드에서 반슬리를 상대로 골을 기록해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또한 그는 팀을 FA컵 결승전까지 진출시켰지만 아스날에게 2:0으로 패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후 스피드는 1999년 5월 22일 FA컵 결승전에 다시 한번 진출했지만 이번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는 2004년까지 7년간 285경기에 출전하였는데 이는 시즌당 평균 40경기를 소화한 것이었으며 40골을 기록하며 중요한 순간마다 해결해주는 면모를 보였다.

2.4. 볼튼 원더러스

스피드는 2004년 7월 75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볼튼 원더러스로 이적했다. 그는 2006년 12월 웨스트햄을 상대로 출전함으로서 EPL 역사상 최초로 500경기를 출전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그러던 2007년 5월 1일 샘 알라다이스가 경질되자, 보드진은 스피드를 1군 코치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는 10월에 코치 직을 관두고 계속해서 선수로서의 삶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4시즌 동안 139경기를 소화하며 여전히 꾸준한 면모를 보였고 2007-08 시즌 중반에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이후 스피드는 셰필드 유나이티드에 이적해 은퇴를 준비했고 2010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5. 국가대표

스피드는 웨일즈 축구 국가팀에서 85경기를 소화했는데 이는 웨일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네빌 사우스올 골키퍼(92경기)의 뒤를 이어 가장 많은 출장 기록이었다. 스피드는 44번째 출장 경기에서 주장이 되었고 그후로 줄곧 웨일즈의 주장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1994년 10월 12일 유로 1996 지역 예선에서 몰도바를 상대르 골을 기록해 팀의 3:2 승리를 이끌기도 했지만 불행히 유로 대회 진출은 좌절하고 말았다. 이후 스피드는 1990년부터 2004년까지 14년간 꾸준히 국가대표로 차출되었지만 웨일즈가 워낙 축구계에서 약소팀이었기에 국제 대회 본선엔 한번도 출전하지 못했다.

3. 감독 경력

파일:external/ichef.bbci.co.uk/_56965508_013328303-1.jpg

스피드는 2010년 8월에 셰필드 유나이티드의 감독이었던 케빈 블랙웰이 경질되자 곧바로 셰필드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다가 2010년 겨울 존 토샥이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를 사임하자, 그가 대신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스피드는 부임 후 치른 A매치 10경기에서 5승 5패를 기록했고 2011년 5월 FIFA 랭킹에서 117위였던 웨일스를 45위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그는 앞날이 창창한 젊은 감독으로서 제2의 인생을 잘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4. 갑작스런 자살


자살하기 전날 BBC에 출연해 인터뷰를 하고 있는 스피드

2011년 11월 26일, 스피드는 BBC 스포츠 프로그램인 '풋볼 포커스'에 출연해 과거 팀 동료였던 게리 매칼리스터와 함께 인터뷰했다. 이 당시 프로그램 진행자였던 덴 워커는 나중에 스피드가 지극히 평온하고 좋은 분위기였다고 묘사했다. 방송 촬영을 오후 1시까지 수행한 스피드는 미디어시티 스튜디오에서 많은 패널들과 함께 담소를 나눴다. 또한 그는 뉴캐슬 시절 팀 동료였던 앨런 시어러와 함께 뉴캐슬이 올드 트레포드에서 맨유와 맞붙는 것을 지켜봤다. 경기가 5시에 끝난 뒤, 스피드는 그의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7시, 그의 아내 루이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남편을 깨우러 침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이상함을 느낀 루이지는 집안을 뒤졌고 이내 집 헛간에서 남편이 밧줄로 목을 맨 광경을 목격했다. 그녀는 7시 8분에 응급센터와 경찰에 연락했고 그들은 곧 현장에 도착해서 스피드를 구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숨져 있었다. 경찰은 그의 죽음과 관련된 의심된 사항은 없으며 스피드가 자살을 택한 것이 확실하다고 발표했다. 그의 죽음은 몇 시간 뒤 웨일즈 축구 협회에 의해 공식 발표되었고 축구계는 물론이고 영국 전역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죽음이 영국 전역에 전해지자, 그와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로비 새비지, 라이언 긱스, 앨런 시어러, 크레이그 벨라미 등이 추모 메시지를 보냈고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비롯해 많은 영국 공직자들이 스피드의 가족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했다. 해외에서도 이러한 추모 물결이 이어져서 UEFA 회장이었던 미셸 플라티니도 추모의 뜻을 전했다. 이후 노팅엄 포레스트와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경기에서, 리즈 팬들은 스피드의 등번호였던 11을 기리기 위해 경기 시작 후 11분 경에 그를 위한 응원가를 불렀다.

또한 스완지 시티 아스톤 빌라와의 경기에서, 스완지 팬들은 스피드의 응원가를 합창해서 불렀으며 애쉴리 윌리엄스, 조 앨런 등 4명의 웨일즈 선수들도 추모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는 상대팀인 아스톤 빌라 쪽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뉴캐슬 시절 스피드와 팀 동료였던 셰이 기븐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리버풀의 선수였던 크레이그 벨라미는 첼시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뒤 "이 승리를 스피드에게 바친다"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이후에도 그를 기리는 추모 행사가 종종 펼쳐졌고 스피드의 가족들은 스피드가 선수 시절 활동했던 축구장들의 초청을 받아 팬들의 위로를 받았다.

이듬해 1월 4일, 웨일즈 축구 협회는 스피드를 추모하기 위해 카디프 시티 스타디움에서 2월 29일에 친선경기를 갖기로 했다. 웨일즈는 스피드가 대표팀 선수로서 첫번째 경기를 치렀을 때 상대였던 코스타리카를 초청했고 코스타리카는 이를 기꺼이 수락했다. 웨일즈는 이날 경기에서 코스타리카에 0:1로 패했다. 그후 2012년 9월 25일, 에버튼은 리즈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리그컵에서 맞붙게 되었다. 경기 시작 후 11분이 지나자, 양측 서포터들이 스피드를 위한 응원가를 합창함으로써 그를 추모했다.

2016년 11월 20일, 스피드의 5주기 기일을 1주일 남긴 시점에서 그가 전성기를 보냈던 리즈 유나이티드와 뉴캐슬 유나이티드가 2부 리그 EFL 챔피언십에서 맞붙었다. 이 경기는 스피드의 추모 경기로 치러져 선수들은 경기 시작 전 1분간 스피드를 추모하는 묵념을 가졌고, 엘런드 로드의 3만 6천 관중들은 전반 11분, 1분간 기립박수를 보내며 스피드를 기렸다. 경기는 뉴캐슬의 0:2 승리로 끝났다.

4.1. 의문점: 자살 동기를 알 수 없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스피드가 죽을 당시 어떠한 외부 침입도 없었으며 자살 외에 그의 죽음을 설명할 수 있는 사인(死因)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자살할 만한 동기가 없다는 것에 있었다.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거나 결혼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가 쌓인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제기되었지만 앨런 시어러는 "스피드가 우울증으로 고생한 것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부인했다. 시어러는 스피드가 자살하기 전날 함께 올드 트래포드로 갔을 때 "매우 신나보였으며 얼마 후에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반면 스피드의 어머니 캐롤은 아들이 "비관주의자"였다고 밝혔고 그의 아내 루이지는 "남편이 내성적인 성격이었다"며 남편이 자살하기 전날에 방송국에 출연해 인터뷰를 가졌던 것을 후에 보게 되었는데 "그의 미소는 진실되어 보이지 않았으며 그의 눈은 슬퍼보였다"고 밝혔다. 경찰은 스피드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는지를 조사해봤지만 어떠한 단서도 확보하지 못했다. 이후 스피드의 자살 동기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5. 수상

5.1. 클럽

5.2. 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