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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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문 대상 | |||||
제32회 ( 1996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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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 19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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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 20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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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수 ( 학생부군신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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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 ( 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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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문 감독상 | |||||
제34회 ( 19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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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 19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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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 20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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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 블랙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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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 ( 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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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 춘향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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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문 시나리오상 | |||||
제26회 ( 19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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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회 ( 19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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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 199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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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홍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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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 나홍규 (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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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빈 유상욱 ( 김의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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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상 | |||||
제19회 ( 19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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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 19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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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 20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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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 강원도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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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 ( 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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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 공동경비구역 J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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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강제규(姜帝圭) |
출생 | 1962년 11월 27일 ([age(1962-11-27)]세) |
경상남도
마산시 (現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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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회원국민학교 (졸업) 마산중학교 (졸업) 마산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연극영화학 / 학사) |
소속 | 디렉터즈 |
데뷔 | 1996년 은행나무 침대[2] |
가족 | 배우자 박성미, 아들 강윤원, 강지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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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영화감독.2000년 전후로 < 쉬리>와 <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들며 한국영화계에 큰 획을 그은 바 있다.
2. 활동
2.1. 중앙대 졸업~시나리오 작가
1962년 11월 27일 경상남도 마산시(現 창원시 마산회원구)에서 태어났다.1984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이후 당대 최고의 감독이었던 정인엽 감독이 소속되어있던 '합동영화사'에 공채 시나리오 작가 합격 연수생으로 입사하여 있다가, 애마부인 등등의 여러 영화의 조연출 및 제작진으로 일한다. 이 시기에 훗날 라이벌 관계가 되는 강우석[3] 감독과 인연을 맺게 되고, 몇 년 후 합동영화사를 나와 'MBC 베스트 극장'등등의 방송작가 및 CF, 수입 영화 각색작가로 일했다. 1989년 동갑내기이자 같은 학교 학과에 다닌 배우 박성미와 결혼하여 윤원, 지완 두 아들을 얻는다. 영화에 대해 갈망하던 중, 합동영화사에서 함께 일하던 강우석 감독의 소개로 1990년 김성홍 감독[4]의 '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의 시나리오를 쓰게 되면서 영화계에서도 조금씩 이름을 알리게 된다.[5]
이 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년)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수상하면서 충무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들 중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했고, 에로틱 스릴러 영화 장미의 나날,액션 느와르 게임의 법칙(모두 1994년 개봉)의 시나리오를 맡으면서 최고의 시나리오작가가 된다.
2.2. 감독 데뷔
1992년에 '흉조의 눈'이라는 영화의 감독직을 권유받았고 크랭크인 직전까지 갔으나 무산되었다. 집단 변사 사건을 역추적하는 형사의 이야기로서, 스릴러를 기본으로 추리와 미스터리와 멜로의 요소가 가미된, 다소 정치적 메시지를 지닌 영화였다. 그러나 아니다 싶어서 거절했고, 1993년에 제작된 공포특급이라는 비디오용 옴니버스 공포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던 그는 김희철 감독과 이 영화의 에피소드 일부를 감독하며 처음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이후 조심스럽게 극장 개봉 영화 감독 데뷔를 결정하게 되고, 1994년부터 자신의 입봉작인 은행나무 침대 시나리오를 직접 쓰게된다.하지만, 이 영화는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는데 시나리오를 몇 백 번이나 수정하는 등[6]의 우여곡절이 있었고 완성된 결과물이 판타지와 SF 혼합물이었기에 당시 영화 제작사들은 시나리오를 퇴짜 놓았다. 여태 그런 장르의 영화들은 망하기만 했기 때문.[7] 더불어 한두 명의 주연이 아닌 여러 명의 주연이 등장하는 영화 특성상 당시 원탑 아니면 투탑으로 주연만 맡기를 원했던 대부분 주연급 배우들도 해당 영화를 거절했다.[8]
영화 상영 초반 대박을 맞이하고 입소문이 타면서 장기 상영에 들어갈 즈음에 씨네21과 인터뷰 한 내용에 따르면 강제규는 만약에 '은행나무 침대'가 제작되지 못한다면, 앞으로 한국에서 SF 판타지 영화는 만들 수 없을 것이라며 제작자에게 자신의 비전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이미 '구미호'를 제작했던 영화사 '신씨네'에서 그의 믿음에 부흥하여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시나리오를 최종적으로 다시 작성하여 캐릭터에 걸맞은 배우 캐스팅까지 완료했다고 한다.
한석규의 경우에는 평범한 마스크에 안경을 낀 도회적 이미지가 너무 강해 제작진에서 반대 의견이 많았었다고 한다. 실제 극장 개봉 당시 전생 장면이 등장할 무렵에 다소 이질감을 느낀 나머지 관객들이 웃었다는 후문이 있다. 그러나 강감독은 한석규의 탄탄한 연기력이 커버할 거라고 굳게 믿고 캐스팅 했고, 한석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드시 하겠다고 응했다. '황장군' 캐릭터는 당시 신현준의 이미지를 생각하면서 설정했다고 한다. 개봉 당시 인터뷰에 따르면 신현준의 데뷔작 '장군의 아들'을 본 강감독이 자신이 생각했던 '황장군'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져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수정할 적에 원래 설정되었던 우락부락하기만 했던 황장군 이미지를 신현준이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는 강함과 여리여리함이 공존하는 이미지로 수정했다고... 그래서 만약에 신현준이 이 영화에 출연하지 않는다면, 강감독은 이 영화를 데뷔작으로 연출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 영화의 책임을 맡은 오정완 프로듀서도 영화 자체를 엎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실제로 신현준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고 직접 강제규를 찾아와 자신이 맡고 싶은 배역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는데, 그 배역이 애당초 강제규 감독이 캐스팅 하기로 했던 캐릭터 '황장군'이었다고 한다. 미단공주 캐스팅의 경우 당초 '깜찍한 이미지'로 설정하여 신인 여배우 오디션까지 했었으나, 조건에 맞는 여배우를 찾지 못했고 최종적으로 진희경으로 결정되었는데 제작진 대다수는 진희경 캐스팅에 반대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영화계의 우려 반, 기대 반[9]으로 6개월간 제작된 은행나무 침대는 1996년 2월 17일 설 연휴에 개봉하여[10],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4개월간의 장기 상영까지 하게 된다.[11] 최종기록은 서울관객 68만 명, 전국관객 2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 영화로 강제규 감독은 각종 영화제의 신인감독상을 휩쓸게 되며, 감독 및 시나리오와 영화 자체의 책임을 도맡아 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몇 안 되는 감독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두 번째 연출작 쉬리의 큰 영광에 가려져서 부각되지 못했지만, '은행나무 침대'이후 강제규는 그가 직접 세운 '영화 발전소'라는 제작사[12]에서 만든 '지상만가'를 선보이게 된다. 성공적인 데뷔작을 선보인 감독과,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배우(신현준)의 출연으로 충무로에서 큰 관심을 모았으나 1997년 2월 22일에 개봉하여 흥행에서 참패하여 영화사는 도산했고 강제규 감독도 전 재산을 탕진하여 한동안 가족과 길거리로 내몰리게 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13] 강제규 감독이 진 빚은 신현준이 모두 갚아줬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영화가 망하면 감독을 아예 포기하는 타 감독과는 달리 강제규 감독은 끝까지 영화를 포기하지 않았고, 남북간의 갈등을 소재로 한 '대국전'이라는 시나리오를 쉬리로 바꾸어 다시 제작 및 감독을 맡게 된다.
쉬리도 은행나무 침대와 마찬가지로 캐스팅 부터가 쉽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흥행메이커 한석규가 흔쾌히 승낙한 덕분에 '삼성영상사업단'에서 전액 투자를 받게 되었으나, 나머지 캐릭터들의 캐스팅이 계속 바뀌었다. 송강호가 연기한 '이장길'캐릭터는 차인표 등의 당대 스타배우들이 거절하면서 최종 낙찰되었고, 신현준에게 캐스팅 제의가 갔던 '박무영' 캐릭터도 우여곡절 끝에 한석규의 추천을 받은 최민식이 최종 확정되었다.[14] 그리고 우연히 주말극 '웨딩드레스'를 보던 제작진들의 눈에 띈 김윤진이 여주인공으로 확정되었다.
1999년에 개봉한 쉬리의 결과는 한국영화의 시대를 나누는 기점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흥행에 대성공. 당시 최고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타이타닉의 기록을 갈아치웠고, 서편제(영화) 이후 10년도 안 되어 서울관객 100만 명 기록을 갈아치웠다. 은행나무 침대, 쉬리의 대성공으로 강제규 감독은 충무로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로 손꼽혔고, 이 여세를 몰아 '강제규 필름'이라는 제작사를 설립하여 단적비연수,[15] 베사메무쵸, 울랄라 시스터즈, 몽정기, 오버 더 레인보우, 블루 등등의 영화를 제작하는 제작자로 활동한다.
쉬리의 성공으로 강제규 본인의 영향력은 물론이고 한국의 영화/극장 산업에서 수입영화에 대비하여 한국영화가 차지하는 위상마저 올라가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고, 이에 자금 투자가 확대되면서 2000년대의 한국 영화산업이 신선함과 자본력을 동시에 갖추어 걸작들을 만들어 내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렇듯 한국영화가 전혀 새로운 전기를 맞게되는 시발점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할 수도 있다.
2004년 강제규 필름은 명필름의 심재명과 'MK Pictures'로 통합했지만 2010년에 명필름으로 환원되었다.
2.3. 태극기 휘날리며 후 쇠락
그의 절정은 2004년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이다. 이 영화로 전 세계 영화시장에서 그의 이름 석자가 통하게 되었고, 실미도에 이은 두 번째 천만관객을 돌파한 영화가 되었다.[16]그러나 이후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작업에 몰두한 끝에 2011년 말에 개봉한 마이웨이가 고증오류, 너무나도 안일한 구성이라는 평단과 관객들의 혹평으로 전국관객 300만 명도 채우지 못한채 흥행에서 실패하게 된다. 덤으로 해외 개봉에도 실패하여 제작비의 반도 회수 못한 채 초라한 퇴장을 하게 된다.
사실 킬링타임용 역사극으로 마이웨이는 범작은 된다.[17] 특히 전투씬은 지금까지도 이를 뛰어넘는 전쟁 영화가 한국에서 나오지 않았을 정도. 그러나, 한 인물의 역사적인 서사시치고 시나리오상 구멍이 확실히 많은 편으로 인물 묘사가 관객 수준에 못 미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실 비슷한 지적은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받았었는데 스토리상 지나친 우연과 캐릭터 디테일 등이 아쉽다는 평가가 많았다.
2.4. 마이웨이 이후
2014년 장수상회를 연출했으며, 당분간 대작 제작은 하지 않겠다고 한다. 재기작 장수상회는 평은 좋은 편이지만 흥행은 3주째에 전국 100만 관객을 겨우 넘기며 그리 대박을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 제작비가 저렴한 편이긴 하지만.2023년 영화 1947 보스톤을 통해 9년 만에 감독으로 복귀했다. 이 영화는 하정우, 배성우, 임시완 등이 출연하는 영화인데, 하필 주연배우 중 하정우 배성우 두 사람이 물의를 일으켜 개봉 전부터 시끌벅적했고, 코로나19로 개봉이 연기되어서 불안불안 했는데, 여기에 역사왜곡 논란에 따른 평판 손해, 그리고 당시 코로나가 완화되긴 했으나, 한국 영화관객의 회복세가 더딘 상황에 주연배우들 악재까지 겹쳐 100만을 겨우 넘기는 흥행을 거두며 상영마감했다. 이로서 같은 시기에 개봉한 더 문, 비공식작전, 드림 등과 함께 충무로의 최대 암흑기를 장식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연출한 1947 보스톤은 역사극이 대부분 그러하듯 지나친 국뽕과 신파의 시대착오적 연출이 지적되면서 관객들의 눈높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노쇠한 감각의 감독이 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높아졌다.
3. 평가
결론적으로 연출가로서 스티븐 스필버그와 롤랜드 에머리히 사이를 극단적으로 오갔던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스필버그 역시 레디 플레이어 원 등에서 의외로 평단의 논란을 낳은 적이 있고[18], 반면 에머리히는 미드웨이에서 기존 평가를 뒤집는 준수한 연출력을 보여준 바 있다.[19]그의 큰 장점은 '유사 헐리우드식 제작'이라는 세간의 혹평[20]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이 실컷 긴장하거나 집중 할 때 마지막으로 관객들이 눈물 흘리며 감동하는 장면을 집어넣는, 관객의 마음을 아는 감독이라는 평이 자자하다. 함께 라이벌 관계로 불리웠던 강우석 감독보다도 더 좋은 평을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결정된다. 강우석 감독은 '무조건적인 마초 분위기'와 '극단적인 신파', '국수주의와 역사 왜곡'으로 관객들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면(대표적으로 실미도[21], 투캅스, 한반도), 강제규 감독은 캐릭터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이고, 그 캐릭터들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각본을 탄탄하게 쓴다는 것이다.[22] 그래서 비록 '마이웨이'에서 추락했지만, 언젠간 재기에 성공할 것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루기도 했었다.
연출력도 충무로 감독 중 확실히 뛰어난 편이다. 2000년대 작품인 <태극기 휘날리며>와 2010년대 작인 <마이웨이>를 지금 봐도 대작으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시대를 앞서간 연출력이라도 평가해도 무방하다.[23] 그는 2000년대 봉준호, 박찬욱, 이창동, 김지운 등 작가주의 감독과 함께 한국영화 중흥기를 열었던 인물이었다. 영상미, 캐릭터, 내러티브 구성 등 연출가로서 능력이 뛰어난 면이 있었다.
4. 강제규 사단
강제규 감독이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면서 함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을 '강제규 사단'이라고 부르는데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현재 왕성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영화발전소'를 운영하던 시절 함께 일했던 김희철 감독은 '지상만가'의 실패 이후 현재까지도 차기작을 내 놓지 못하고 있다.[24] 박성균 감독과 박제현 감독은 2000년대 현재 '최악의 영화'로 손꼽히는 김관장 대 김관장 대 김관장, 단적비연수로 데뷔하였고 박제현 감독은 2014년 설 연휴에 개봉한 조선미녀삼총사로 '최악의 감독'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2002년 오버 더 레인보우로 데뷔한 안진우 감독은 케이블 드라마 신의 퀴즈 이후 차기작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은행나무 침대의 조감독을 맡았던 박광춘 감독은 1998년 퇴마록으로 데뷔하여 흥행에 성공했어도 원작을 훼손한 혐의로 원작 및 영화팬들의 욕을 많이 얻어먹더니 2000년대 들어 잠복근무, 울학교 이티 이후 소식이 없다.
그나마 김용화 감독이 2003년 오 브라더스로 데뷔하여 흥행에 성공하고 미녀는 괴로워, 국가대표로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며 꾸준한 연출활동을 했고, 2013년에 개봉한 미스터 고가 흥행에서 참패해 주춤했으나 2017년과 2018년에 연달아 개봉한 신과함께 실사영화 시리즈가 흥행이 대박을 치면서 재기했다. 그러나 2023년, 영화 더 문이 대폭망했다.[25]
5. 필모그래피
강제규 감독 장편 연출 작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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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연도 | 제목 | 역할 |
1990 |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 각본 |
1991 |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 각본 |
1994 | 공포특급 | 연출[26], 각본 |
1994 | 게임의 법칙 | 각본 |
1994 | 장미의 나날 | 각본 |
1996 | 은행나무 침대 | 연출, 각본 |
1997 | 지상만가 | 각본 |
1999 | 쉬리 | 연출, 각본 |
2000 | 단적비연수 | 제작, 각본 |
2001 | 베사메 무쵸 | 제작 |
2002 | 몽정기 | 제작 |
2002 | 울랄라 시스터즈 | 제작 |
2002 | 오버 더 레인보우 | 제작 |
2003 | 블루 | 제작, 각색[27] |
2004 | 태극기 휘날리며 | 연출, 각본 |
2005 | 안녕 형아 | 제작 |
2011 | 마이웨이 | 연출, 각본 |
2014 | 민우씨 오는 날(뷰티풀) | 연출[28], 각본 |
2014 | 장수상회 | 연출[29], 각본 |
2016 | 나쁜놈은 죽는다 | 제작[30] |
2023 | 1947 보스톤 | 연출 |
- | 우키시마호 프로젝트 |
6. 수상 경력
<rowcolor=#fff> 연도 | 시상식 | 부문 | 작품 |
1991년 | 제27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 시나리오상 |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
1996년 | 제17회 청룡영화상 | 신인감독상 | 은행나무 침대 |
제34회 대종상 영화제 | |||
1999년 | 제20회 청룡영화상 | 감독상 | 쉬리 |
제36회 대종상 영화제 | 기획상 | ||
제35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 대상 | ||
영화 작품상 | |||
영화 감독상 | |||
제44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 심사위원특별상 | ||
제2회 디렉터스컷 어워즈 | 올해의 영화인 | ||
2001년 | 제24회 황금촬영상 시상식 | 제작공로상 | |
2004년 | 제12회 춘사영화상 | 심사위원특별상 | 태극기 휘날리며 |
제40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 작품상 | ||
2005년 | 제2회 독일 아시아 영화제 | 인기상영작 | |
제2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 최고의 작품상 | ||
최고의 감독상 | |||
제50회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 감독상 | ||
최우수 작품상 |
[1]
1997년, 1998년 수상자 없음.
[2]
자기 이름 석 자를 걸고 데뷔한 작품이라면 1990년에 개봉한 '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의 시나리오 작가가 맞지만, 이 항목에서는 감독에 대한 설명이므로 감독 데뷔작을 데뷔작으로 한다. 더불어 개봉영화 데뷔작은 은행나무 침대이며 비디오 옴니버스 영화 공포특급에서 <국화>, <13인의 피>를 감독한 게 첫 감독 데뷔작.
[3]
강우석은 강제규가 연수생으로 들어오던 당시 연출부나 조연출일을 이미 하고 있었다.
[4]
손톱, 올가미 등등의 1990년대 스릴러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5]
이 영화에 당대 하이틴 스타
변우민이 주연으로 나오며,
김보성,
이범수,
공형진이 단역으로 출연한다.
[6]
원래는 여관방의 침대를 쓰고 떠나가는 연인들의 이야기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수정해 가면서 전생의 이야기가 삽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나리오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중국의 유명 여류 작가에게 시나리오 보강 작업을 의뢰했으나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았다고 한다.
[7]
그 전에
정우성,
고소영의 '구미호'라는 판타지 영화가 개봉되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SF/판타지 장르는 2000년대에 들어선 지금도 제작되기도 힘들고 성공시키기 힘든 장르다.
[8]
심혜진을 제외한 나머지 배역들은 배우들이 수차례 교체되었다. 영화 속 한석규 캐릭터의 경우, 먼저 거론된 배우가 '안성기', 신현준은 '최민수', 진희경은 '강수연'이었다.
[9]
은행권의 자본이 투입된 최초의 영화라는 점에서 충무로의 기대를 받았지만, 이를 제외한 나머지가 우려였다. '구미호'의 대 실패로 인한 한국형 판타지 장르에 대한 우려, 감독으로서 검증받지 못한 신인의 데뷔작이라는 것에 대한 우려, 18세 이상 관람가라는 큰 약점... 그리고 같은 날에 개봉한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는 유명 감독이 무려 7명이 연출한 작품인지라 더 비교되기도 했다. 한석규, 심혜진, 진희경, 신현준이라는 당대 스타급 배우들의 캐스팅이었지만 이 배우들도 영화 촬영 기간에 주변인들의 비아냥을 들으면서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10]
본래 겨울방학과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1995년 12월에 개봉하려고 했었으나 제작 및 특수효과 후반 작업이 늦어지게 되어 개봉시기가 연기되었다. 때문에 촬영 후반부 즈음에는 제작사 신씨네의 신철 사장과 강제규 감독이 자주 갈등하고 다투는 모습이 많이 목격되기도 했다.
[11]
악역 '황장군'이 여태껏 등장한 한국영화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라는 점에 입소문이 타기 시작했고, 이에 여성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얻게된다.
[12]
사실 '은행나무 침대'는 '신씨네'와 '영화발전소'가 공동제작한 영화다.
[13]
다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평은 갈리는 편이다. 당시 미진했던 한국영화 제작환경속에서 잘 만든 영화라고 평가하거나, 당시 한국영화계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수준을 엿 볼수 있다는 평이 호평이고, 이야기 없이 그저 감각적인 영상과 음악에만 의존했다는 혹평도 만만치 않다.
[14]
쉬리' 이전의 제목은 '대국전'으로 신현준은 이장길과 박무영 역할을 동시에 제의받았었다. 당시 이장길 역할은 한석규가 연기한 유중원 역할과 비중이 거의 비슷했고 특성상 유중원을 움직이게하는 가장 중요한 캐릭터이자 본래 박무영 캐릭터보다 더 돋보이는 캐릭터였었다. 그러나 신현준과 차인표 모두 거절한 이후 배역 비중이 줄어들었고, 최종캐스팅된 송강호가 코믹한 이미지를 벗지 못한 탓에 이장길과 유중원 모두 캐릭터가 살지 못했다.
[15]
'은행나무 침대'의 후속작이다. 최근 '조선 미녀 삼총사'로 거히게 말아먹은 박제현 감독의 데뷔작이다.
[16]
이후 실미도의 감독인 강우석 감독과의 대담에서 서로 농담을 주고받는데 내가 먼저 천만관객 돌파한 작품 감독이 됐어야 했다고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17]
덩케르크는 못 돼도
미드웨이 정도는 된다는 이야기.
[18]
다만, 다른 스필버그 작품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비판받는 거지, 이 영화도 제법 호평받는 수작이다. 애초에 스필버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호평받는다. 굳이 따지자면
1941(영화) 정도가 비판받는데, 이 영화가 오히려 더 마이웨이의 실패 사례와 흡사하다. 다만, 이 1941도 문서에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의외로 재평가받는 부분도 있다.
[19]
다만 평론가 평은 여전히 호불호가 갈린다. 여타 연출작에 비해서 역사극으로 대작 연출력을 입증했다는 정도가 정확하다.
[20]
사실 당시 시대상에서 과도한 비난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그 후 넷플릭스 시대에도 헐리우드 카피작이 더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21]
다만 실미도는 이전부터 684 부대원들을 대놓고 죄수 및 전과자 출신 인물들로 묘사했다는 점이 가장 집중적으로 논란이 되었는데다, 그 당시까진 한국 영화의 고질적인 신파성 연출 문제가 부각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거의없다가 이 영화를 비판하기 전까진 전개 면에서는 그렇게 비판받지 않았다.
[22]
심지어 실패했다고 평가받는
마이웨이도 고증을 제쳐놓고 전투 장면들을 묘사한 영상미를 기준으로 국내 전쟁 영화들 중 정상급의 수준이고, 시나리오에 결점이 상당히 많음에도 imdb 평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저력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제작비를 들인 만큼 그에 걸맞은 규모, 영상미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비판하는 사람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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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던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만 보더라도 오랜 영화임이 느껴지는 것과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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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 연출을 한다는 설이 나돌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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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나 그의 작품들을 보면 알겠지만 흥행력으로만은 강제규 사단을 넘어, 강제규 감독 또한 훨씬 뛰어넘는 독보적인 천만 감독이다. 다만 그의 작품들은 마치 김용화 감독과 비슷한
윤제균 감독과 다를바 없이 작품 베끼기, 질 떨어지는 각본, 이를 신파로 가려내서 작품성은 까어도 어찌저찌 흥행작을 양산해내는 감독이라, 흥행과는 별개로 평가는 저 위의 감독들과 다를바가 없다. 그나마 흥행 감독으로서의 실적은 된 편이라 저 감독들과 달리 왕성한 활동을 할 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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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니버스 영화로 김희철과 공동 감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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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해곤'이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강제규 감독이 고증 및 각색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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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장위엔' 감독과 함께 감독을 맡은 옴니버스 저예산 영화이며, 고수와 문채원이 주연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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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방은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기로 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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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합작영화로 중국에서는 2015년 11월, 한국에서는 2016년 2월 개봉했다.